내가 태어난 곳은 가르마 같은 논길, 맑은 강과 높은 간드리 산이 있는 정감어린 향토빛 시골이다. 어린시절 여름날 무심히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흐르는 구름은 생동감있게 하나의 형상에서 또 다른 모습을 만들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는 꿈과 희망이 흐르는 것 같고 그 곳으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싶고, 거기에는 영혼들의 언어와 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신비스러운 모양을 어떻게 그림으로 남겨놓을 수는 없을까? 는 생각에 빠졌다. 이런 모든 잠재된 사상(事象)이 오늘날 내가 형상화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상상과 상념들을 표현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점, 선, 면과 아름다운 색채 등으로 이 모든 이야기들을 깊이가 있으며, 조형적으로 완결성과 통일성을 다 갖추어 화폭에 완벽하게 담는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하루하루 절실히 느낀다. 더구나 기존의 회화와 다른 독창적인 유형을 창출해내기 위하여는 나 자신은 고뇌와 시련속에서 부단히 작업하며 한없는 시간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고통의 결과에 때로는 조그마한 위안을 받기도 하지만 성취감은 미미하다. 이 점을 미루어보아 나에게는 한 송이 국화꽃 보다는 국화꽃을 피우는 과정을 좋아하는 심층이 있었나 보다. 그러니 나에게 그리는 행위는 자신과의 대화이고, 자신을 정화시키는 수련이고, 은밀한 정서의 터밭이고, 삶의 철학이다.

 

여기 첫 개인전을 미숙아를 낳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선보이는 뜻은 더 높은 영적인 교감을 통해 새로운 것을 얻을 그 날을 위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길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 땀을 흘릴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한순간 우리의 감각에 다가와 아름다움의 느낌을 던져주고 곧 사라지는 존재의 표상을 묘사하기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상상과 상념의 내용을 그리고 싶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신과 대화이고, 정화를 위한 수련이고, 나의 정서요, 나의
   철학이다.

 

▶느낌을 그리고, 그린 것을 생각에 따라 지움은 새로운 느낌을 가지려는 반복의 시작이다.

 

▶무수한 삶의 기복과 행위의 정당성을 깨달으면서 완성을 기다리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천직임을
   자각한다.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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