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 / 박 용 숙

 

-이 곳에서 저 곳으로-

 

본다는 것은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노력이고 창조적인

작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인 의미의 ‘본다’는 것은 상습적인 것이다. 그것은 안이함이고

인위적이고 따라서 왜곡된 진실이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환경이 얼마나 왜곡되어있는지를 잘 안다.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정보나 거리의 상품광고들은 순수시각을 해치는 허상이다.

이들 허상 이미지들은 ‘본다’는 순수인식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우리의 삶의 본질을 편견과 오류로 몰아간다. 이것은 단순히

자본주의 문명이 가져다주는 인위적인 재앙이기보다는 ‘본다’는

시각의 운명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지각이 있는 작가라면

한번쯤은 이 잘못된 시각환경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는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소박한 의미의 추상미술의 기초개념이라면 장광덕의 추상작업도

이런 맥락에서 시도 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 될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작업과정의 기본방향은 삶의 이야기.

우주의 질서와 신비. 생명이 끝난 후 미지의 세계들이다.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지만 이것들은 의식적으로

캔버스에 표출시키는 것이다.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시리즈도 나의 목마름의 의식이 무엇인가 깊은 곳으로

도달하려는 갈마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고 싶다.

(2001년 작업일기)

 

 

 이 글에서 화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그는 생명이 끝난 후의 미지의 세계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그가 왜 추상작업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화가에게 있어서 추상세계는 일단 무질서(무의식)이고 그 무질서는 기성이미지를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 세계로 설명될 수 있다. 화가가 예쁜 꽃병을 그리기보다 차라리 깨어진 꽃병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추상 미학은 창조를 위한 파괴와 파괴를 통한 창조라는 이율배반의 논리에 근거한다.  화가는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고백하고 있다. 장광덕의 추상양식은 2천 연대를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시도되며 그 시도는 아무런 근거가 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고백에서도 보았듯이 고난의 역정을 거쳤다. 이런점은 2천 년 이전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그러니까 그의 추상은 사실의 세계와 추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중간 단계를 통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추상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그린 그의 누드를 보면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추상의 세계로 들어오게되는 지를 보여준다.

 

 2001년에 <마이아트>갤러리에서 선 보였던 작품 중에는 몇 점의 누드화가 있는데 그 누드는 매우 독특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색조로 보면 그것은 어딘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보인다. 하지만 그 누드에서 사실의 세계를

파괴하려는 충동이 드러나 있다. 누드는 길게 쭉 뻗은 옆모습으로 베게를 베고 누워있다. 여체는 추상적인 배경과 회색톤의 살갗을 가진 몸으로 차가운 분위기를 주는 느낌을 주지만 화가는 그 느낌을 변주시키기 위해 장식을 이용한다. 그 장식은  추상적이다. 화면의 맨 밑에 누드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길게 추상적인 화면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것은 누드를 장식하는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화가는 이 누드를 통해 ‘본다’는 문제를 반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식은 강렬한 원색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추상충동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사실상 이 작품에서 장광덕의 추상의지가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추상성과 사실성을 동시적으로 배열하는 방식은 이미 원로화가 김흥수의 시도로 잘 알려져 있지만 장광덕의 사실시각과 추상시각의 동시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고 그 나름의 추상화를 시도하기 위한 한 과정이다. 이런 점은 그 뒤에 발표되는 누드화에서 드러난다. 누드는 실체를 상실하고 있으며 그 상실의 과정을 그는 캔버스에서 보여주고 있다. 누드는 추상적인 물질로 가득 찬 공간 속으로 녹아 들어가며 구체적인 형상들을 잃어간다. 그것은 초현실주의가 그랬듯이 사물이 그 중량을 잃는 과정과 흡사한 것이다. 먼저 윤곽선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무게를 보여주는 볼륨이 사라진다. 우리는 이것이 다름 아닌 사물의 무게와 공간의 긴장관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실험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샤갈은 인간을 공중에다 띄웠고 피카소는 사물을 보는 일 시점을 버리고 다 시점을 시도했다. 플록은 아예 붓을 캔버스에 대지 않고 공중으로 물감을 떨어뜨리기만 했다. 아름다운 꽃병을 부셔서 미지의 세계로 되돌리고 싶다는 화가의 의지는 바로 이런 맥락과 다르지 않다. 그가 자신의 실험을 일컬어 ‘이곳에서 저곡’이라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이~저’가 되었던 것은 그렇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곳’은 삼차원의 세계이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보는 사물의 세계이기도 하며, ‘저곳’은 그 삼차원의 세계에서 해방되는 미지의 세계를 지칭한다. 그것이 ‘이~저’의 세계이다.

 

 장광덕의 작업에서는 색채와 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색채는 덩어리로 존재하기도 하고 창조이전의 어떤 신비한 물질처럼 이리 저리 밀려다니기도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덩어리 속에 여려 모습의 인간 얼굴이 무질서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구상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하다. 사실 생명이 끝난 미지의 세계는 거꾸로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물리학자들의 언어를 빌자면 그것은 생명의 원인이 되는 우주의 네 가지 원소

(수소 산소 탄소 질소)가 서로 뒤죽박죽이 되어있는 세계의 표상이기도 하며 중력의 흡인력에 의해 원소들을 합쳐졌다가는 또 흐트려지고 그 속도에 의해 때로는 격렬하게 회오리치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장광덕의 선도 바로 이런 시각으로 바라 볼 수가  있다. 그가 보여주는 선이 수묵처럼 검은 선으로 나타나고 붓질의 힘이나 방식이 어딘가 서체적인 마감을 보여주는 것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인체를 보여주는 형상이 빠른 속도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도 서체 미하그이 영향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추상표현주의 적인 격정이기보다는 화가의 내면에 엉켜있는 감정의 치열함과 그 긴장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긴장감은적절한 대상에 따라 다양한 분출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컨대 꽹가리를 치는 풍물놀이의 인물이나 춤꾼의 춤사위는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런 예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장광덕의 작업에서 물감은 표현언어의 질감을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하고 감성을 촉진하는 색채언어가 된다는 것은 그를 색채화가라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하다. 그의 색면이나 색의 매쓰로 나타나며 그는 이런 방법을 통해 화면을 연출한다. 색은 즉물적이지만 그러나 그의 색은 무언가 그 내면에서 숨을 쉬며 어디론가 끊임없이 유동하려는 충동을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질감과 속도의 관계이기도 하다. 색채는 형태를 변형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형태에 속박된 관습적인 시각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것은 붓질 그 자체나 색채 그 자체를 표현의 목표로 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장광덕은 그 모든 행위의 결과가 캔버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주시한다. 그것이 그의 내면이기 때문이다.  나의 실존은 그림을 통해 완성된다. 그 완성은 그러나 추이(推移)된 과거다. 완성된 과거는 현재를 근거로 앞날을 향해 움직인다. 삶은 결핍과 유동의 불가해한 과정이다. 삶은 요동친다. 삶은 찰나, 찰나마다 눈부시게 반전한다.

 

 나는 견자(見者)다.

나는 삶의 비밀을 그림을 통해 힘겹게 드러낸다. 그 과정은 나를 비우는 정화의 과정이다. 사물은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물의 아름다움은 수시로 추이되는 것이어서 그것의 잔명은 허망하고 덧없다. 나는 사물의 율동이 전하는 전언(傳言)을 그린다. 자유로운 연상, 유연한 내재율의 율동, 살아있는 것들의 섬세한 사람의 징후들은 나의 그림과 극적으로 만난다. 사람은 유동적이고 유연적이며 또한 즉흥적이다. 그러나 그 불연속적인 삶도 생명 스스로의 엄정한 질서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 즉 정체성(正體性)의 다른 이름이리라.

 

 나는 요동치는 사람의 낌새들을 화폭에 옮긴다. 삶의 징후들은 끊임없이 명멸하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율동이 내 삶의 박동과 포개어질 때 그때 나의 그림은 완성된다. 생명의 율동은 탄생에서 소명을 향해 움직인다. 그 동선(動線)은 반영이자 지움이고 표현이자 망아(忘我)이다. 삶의 내밀한 비밀이 역설이듯이 내 그림의 비밀 또한 역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그 역설이 상식이 되어야만 하는 불가해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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