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 인 하
作家 장광덕을 기억하려면, 흐린 날 환영처럼 그렇고 그렇게 스쳐지나 간 듯한 大邱에서의 4년 대학생활로 되돌아 가야만 했다. 한참을 지난 후에야 그 기간의 배움과 동료들과의 만남, 열정, 혼돈 등등이 지금까지 살아 오는데 얼마나 많은 몫을 해왔는지를 어렴풋이 헤아리게 된 것도 그냥 스쳐 버린듯한 내 무감각의 탓일 것이다. 아마 그때쯤의 장광덕을 찾으면 뭔가를 끄집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지난 팔월 하순, 작업실에서 접한 그의 전화 목소리는 근이십여년이 지난 긴 시간을 훌쩍 뛰어 넘은 그 흔적의 집적물을 건드린 듯 혼돈스러움과 함께 와 닿았다. 명료하게 특유의 억양으로 흔들어 대는 투명함과 만난 후 비로서 나는 그의 기억이 확연이 각인되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 무렵, 대부분의 동료들이 그러했겠지만 어쩡쩡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劇적으로 살아온 동서양 화가들의 환상적인 삶에 대한 魅了 시대적 상황 앞에서의 황량함과 푯대없는 목표에 대한 불확실성 등등이 우리들 생활을 꽤도 많이 흐느적 거리게한 혼돈속에 함께 있었다. 한 켠에서 여전히 작가는 비현실적 이상 속에서 존재해 있었고 우리가 알고 있던 문화는 高踏적순수속에서 제목소리 다듬기에 급급했으며 여타의 동료들 생맥주와 통기타에 쉰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극사실적 표현과 무색 무취의 미니멀, 개념예술들의 昏迷와 이벤트, 해프닝, 설치 미술들의 거친 몸놀림의 불협화음들이 우리의 줏대가 가다듬기 전에 몸 전체에 묻어 있었고 다듬고, 가꾸어, 재조명되어 드러난 이중섭의 흰색 황소는 더욱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의 乖離를 부추겼으며 우리들 틈 사이에 독한 흔들림으로 멈춰 있었다. 궁색해 진 지식의 漏水사이로 낯선 용어와 미학적 갈등, 그리고 삶에 대한 진부한 고통 등등이 매케한 채류가스와 함께 어우러진 그 자리에선 나는 장광덕을 만났다.
나는 오늘, 다시 처음처럼 作家 장광덕을 만난다.
그저 편안하게, 담담하게, 목청 돋우지 않으며 실기실 한 벽면을 청회색 화면에 메여있던 그에 대한 기억이 비록 전부라고 할지라도 오늘 나는 처음처럼 장광덕을 만난다. 선고지된 의미가 없는 그야말로 문득접한 그의 화면과 함께 지난 이십여년의 시간과 함께, 또 기억속의 청회색 그 외 하면과 함께. <말레비치>는 절대주의 선언을 통하여 예술에서 필요한 것은 성실이 아니라 眞實이라고 했으며, 對象은 새로운 미술문화를 위하여 연기처럼 사라졌으며 이로써 우리는 창작의 자율성을
획득하고, 자연의 형상을 지배하기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궁극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제 몫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물론 귀 기울이고자하는 사람의 몫은 작가와는 별도의 것이다. 진실된 작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작가의 그 노력에 비해 얼마만큼이나 가까이 가 있을까에 대한 해답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判異한 生成의 배경과 자신만이 갖는 이상적 현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목소리들이 어우러진 진실을 읽기란 더더욱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장광덕은 내게 그림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발전이라기 보다는 변화라는 말로 미술의 역사는 對辯된다. 그렇지만 한 개인의 변화는 발전을 근간에 둔 변화일진대 그의 변모에 대한 기대는 더욱 우리를 설레게 하는 일중의 하나이다. 담담하게, 또는 유희적 놀이마당처럼 펼쳐진 그의 화면에서 어쩌면 지난 만남이 아닌 그 이전 아무런 免職없이 무심코 더불어 뛰놀던 그 마당에서 만난 듯한 질펀한 몸놀림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일반 언어학강의>에서 언어는 사회적 현상이며 기호들의 구조적 체계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의 언어를 갖고 있다. 그렇듯이 기호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그 목소리를 통해 기호의 상징된 의미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 소쉬르는 형식과 내용을 대별하여 형식을 시니피앙, 내용을 시니피에라고 했다. 표현을 전제로한 회화의 장르에서 시니피에는 작가의 잠재적 미의식과 표현욕구에 의존하더라도 우리는 작가의 시니피에를 시니피앙을 통해 전달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을 전달받기란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장광덕의 회화에서는 화면 전체, 또는 구획 되어진 화면위에 자유분방하게 펼쳐진 작가만의 기호, 필치 등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의 운행의 질서가 획득됨을 발견할 수 있다. 구조화된 형태나 선, 그리고 흔적들에게 작가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는 이미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제한되어 지거나 강요되어진 의미로부터는 떠나 있다. 스스로 제 목소리를 갖고 무수한 색점으로나 선, 또는 색면으로 스스로의 외침을 갖고 있는 것이다. 들리는 이는 그의 진실된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1995年 9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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